존재의 변화 이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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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존재, 현상세계, 나와 세계, 물질, 우주라는 이 모든 모양이 있는 것들, 이 색이 무상하게 변해간다는 거죠. 무상하고 무상고 무하다, 산법인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무상하게 변하고 그것은 괴로움인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고정된 자아가 있지 않다. 즉 인연 따라 모이고 인연 따라 흩어질 뿐이지 거기에 고정된 자아라는 어떤 실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계속해서 변해가는 것이라서 상의성이나 주제성을 지닌 것도 아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존재의 가치와 변화
즉 쉽게 말하면 우리가 집착해야 된다면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거에는 집착해야 되겠죠? 그런데 애초에 집착할 가치가 아예 없는 것, 값어치가 없는 것, 그런 거에는 집착할 이유가 없잖아요.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물질은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사라지는데 내가 원할 때 오고 내가 원할 때 가는 게 아니라 인연이, 인연법이 인연이 맞을 때 시전 인연이 맞을 때 왔다가 시전 인연이 닿으면 가는 거예요.
내 뜻과는 상관없이 움직인다. 물론 내 뜻도 어느 정도 반영은 되겠지만 그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내가 그 모든 것을 주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내 뜻대로 오고 가는 게 아니라 주고 오고 싶을 때 왔다가 찍어 가고 싶을 때 간단 말이죠. 다 그래요. 사람도, 돈도, 명예도, 권력도 모든 것들이 신기하게 의도하지 않았어도 올 거는 와요. 신기하게. 또 크게 의도하지 않았어도 가야 될 인연이 오면 그냥 스르륵 가버려요.
그렇게 주거라고 밀쳐내도 밀쳐내도 안 밀쳐내지던 것이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고 해탈하고 살았는데 스르륵 떠나가기도 한단 말이에요. 나에게 달린 일이 아닙니다. 즉 물질이라는 것은 내가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아니에요. 개념 따라오고 가는 것은, 실체 이런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러니까 집착할 만한 값어치가 없는 거니까 과도하게 집착할 필요는 없는 거죠.
그런데 이제 이 재미있는 꿈의 세계 속에서 이 인연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이 꿈의 세계 속에서 그냥 뭐 재미있게 가지놀면서 살 수는 있겠죠. 그런데 이게 고정된 실체적 자아가 아니고 영원하지 않다. 그러면서 아 내가 집착할 필요가 없었는데 지금까지 내가 험하게 집착하면서 살아왔구나. 그래서 괴로웠구나. 오케이. 나의 괴로움이 왜 있었는지 이제 깨달았다. 내가 돈, 명예, 권력, 지위 모든 것을 너무나 과도하게 집착해 왔었구나.
그것도 남들과 비교하면서 저 친구가 저 정도 사는데 나는 그거보다 더 살아야 되지 않아? 이런 식으로 비교, 분별하면서 내 생각을 믿은 채 더 열심히 막 그냥 집착하고 잘 살라라니까 부유함에 집착하면 오히려 마음은, 마음 한 면에는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마음은 어떤 마음이 더 커지냐면 집착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같이 커져요. 그러니까 집착이 과도해질수록 두려움도 과도해져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인연이 될 것도 내가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안 되면 어쩌지 하는 두려운 마음 때문에 오히려 방해가 된단 말이죠.
그래서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까 아, 내가 태어나서 처음 알았다. 세상은 공한. 것이구나. 무상고 무하인 것이구나. 고중 때 실체적 자아라는 게 없구나. 인연 따라 오고 가는 것뿐이구나. 내가 어디도 집착할 게 없었네. 이제 알았네, 내가. 세상이 공허하다. 그래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이게 정말 맞을까요? 부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를 보면 될 거예요.
부처님은 공을 깨달으셨을 거 아니겠어요? 무하를? 그런데 부처님이 그 말씀 몇 번 드렸던 것 같아요. 세계의 역사, 세계사 학자들이 꽤 많은 사람이 모여서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했던 인물, 인물을 윤리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취적으로 모든 면을 다 봐서 점수를 매겨서 가장 높은 사람이 누군지를 보자 했더니 그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모여서 뽑은 분이 부처님이라는 거죠. 석가문의 부처님. 석가문의 부처님은 수많은 정교 교재들 가운데 놀랍게도 당대에 엄청난 성공을 이루신 분으로 꼽히더라고요.
진실과 무소유
당신 살아있는 동안, 보통은 당신 열받아지고 나서, 당신 죽고 나서 그 다음 때 누군가가 막 전법을 하고 해 가지고 유명해지고 그러잖아요, 보통은. 그런데 부처님은 당신 살아계시는 그동안, 부처님이 얼마나 많은 나라를, 인도 제가 걸어 다녀보니까 정말 넓고도 넓고도 광활해요. 우리가 그걸 걸어 다닌다는 상상을 못 할 정도로 더 넓어요. 기차를 타고 다녀도 더 넓어요. 그런데 그곳을 차가 없었잖아요.
걸으면서. 그 더운 날, 여러분 8월, 9월 이때쯤 가면요. 정말 이런 날씨가 있구나. 한국의 34도, 35도는 애교 같은, 정말 죽을 것 같은 더위 속에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아요. 그 무더위 속에서 부처님께서는 평생을 걷고 걷고 또 걸으셨어요. 부처님 제자들 60명이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아라한과를 증득했을 때 그들에게 한 사람이, 두 사람이 함께 한 길로 가지 마라. 한 명이 각자 자신의 길을 가면서 각자 자신이 만나는 사람에게 그들의 괴로움을 구제해 주라. 이랬단 말이에요.
그리고 부처님, 당신도 나도 오르벨라로 가리라. 당신도 수많은 그 당시 가장 유력했던 종교 단체, 한 천여명 제자들을 데리고 있던 가섭 삼 형제라는 단체를 찾아가서 그들을 교화시키고 무수히 많이 끊임없이 걷고 또 걸으면서 무수히 많은 절을 하신 거죠. 그런데 지금처럼 불사해라, 불사비 내세요. 부담 주어가면서 할부도 됩니다. 하면서 이렇게 불사비를 걷어서 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당신이 한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냥 신도님들이 자발적으로 당신들이 원해서 그냥 이절저절을 시사를 하고 보시를 하신 거예요. 그럼 당신은 절이 있으니까 그곳에서 법문 들을 사람이 있으니까 그냥 그곳을 가셨던 거예요. 거리 아무리 멀고 상관없이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러 다니셨던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은 끊임없이 움직이신 분이에요. 이렇게까지 왕성한 한 동력을 보여준 분이 안 계세요. 인도 부처님이 다니셨던 대부분의 나라의 왕들이 전부 다 부처님께 귀이하고 불교로 개종을 하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공하니까 깨어 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런 분이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이일현 측면, 공하지만 다시금 공불이 새긴 측면. 그러나 공이 죽어있는 공이 아니란 말이에요. 살아 생동감 있게 살아있는 춤추는 공이란 말이에요. 우리 삶이 자기가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있단 말이에요. 죽어서 무기력해지고 그런 게 아니에요. 그래서 대승불규에서는 이런 측면을 제법 실상, 제법이 있는 이대로가, 있는 이대로 이 현실이, 이 색이라는 이 현실이 그대로 실상이다. 이게 실상이라는 소리예요. 이게 진실이라는 뜻이거든요.
총목보리, 눈으로 보는 모든 것들이, 보이는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진리 아닌 것이 없다. 입초개진, 자기가 서 있는 그 자리가 참된 진실의 자리 아닌 것이 없다. 완전하게 진실이 100% 드러나 있단 말이에요. 눈앞에, 목전에 환하게 밝게 드러나 있단 말이죠. 진실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안다면 집착 없이 살아야지, 이건 이제 앞에 색불이공 했을 때 집착 없이 살아야지 하고 집착 없이 살게 돼요.
그런데 공불이색까지 균형감 있게 중도적으로 두 가지를 함께 아울러서 깨닫게 되면 집착 없이 사는데 그냥 완전히 무소유, 극단적인 무소유주의자가 되지 않아요.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가 뭔지를 알아요. 그냥 공하다 이러면 소유할 필요가 없구나. 그럼 내 걸 다 갖다 버리는 게 무소유겠네. 열심히 안 살 수 있단 말이죠. 그런데 불교의 무소유는 그런 게 아닙니다. 소유하되 소유하는 바에 집착하지 않는 것. 그러면 어떻게 해야 소유하되 소유하는 바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내가 소유하고 있긴 한데 이게 내가 진짜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이것을 가지고 있는 게 환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내가 소유한다는 사실 자체가 환상이구나. 나라는 것 자체가 환상이구나. 나도 환상이니까 내 것도 환상이구나. 진실이 아니구나. 이건 그냥 인연 따라 쓰고 있을 뿐이지 이게 진짜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거예요. 본래 소유할 수가 없다는 사실에 눈 뜨는 거예요.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아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바보가 땅에다 금을 긋고는 '이거 내 땅이야'라는 걸 사람들에게 믿게 했단 말이에요. 그건 내 땅일 수가 없잖아요.
단 한 순간도 내 땅일 수가 없잖아요. 사실은 내가 쓰면 내 땅인가요? 그러면 우리는 아무 데나 북한산도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고, 하늘도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고, 비행기 타고 놀이공원도 다니고, 공원도 다니고 하잖아요. 그럼 그 공원 다 내 건가요? 많이 쓰는 사람이 자기 거면? 어떤 사람은 내 거라면서 땅을 샀는데, 그게 어디인지도 모르고 그냥 옛날에 사놨대 그리고 30년, 50년 만에 그 땅을 다시 팔겠다 이런 사람들도 있다. 그래요, 내가 실제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망상이죠.
내 사람, 내 가족은 망상 아닌 것 같잖아요. 내 가족도 생각이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내 자식, 보편적으로는 그렇죠? 근데 제가 워낙 많은 분들을 만나다 보니까, 어쩔 수 없는 인연 때문에 그렇겠죠. 인연이 또 그 사람의 성격도 만들었을 것이고 그런 경우도 있어요.
요즘 젊은 청년들 그러잖아요. 어제까지 남이었고 싫었던 친구가 갑자기 오늘 사랑해지기 시작하면 내 모든 걸 다 줘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 돼버려요. 어제 같으면 밥도 안 끼고 비싼 거 못 사주다가 내 사람이 된다는 마음의 이미지를 쥐기 시작하면, 그 사람을 위해서 전재산을 줘도 아깝지 않잖아요. 내가 소유한다, 가진다, 내 사람이다, 내 가족이다, 내 것이다 하는 모든 것이 전부 다. 이렇게 관념으로 만드는 거예요. 허상을 쥐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진실은, 진실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이 물질세계가, 물질우주가 전부다 고정된 실체는 아니에요. 인연은 따라오고 인연은 따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 연기적인 인연의 꿈속에 살고 있어요. 그리고 이 현실, 이 현실이라는 눈앞의 현실은 실질적으로 나에게 엄중한 타격을 입혀요. 돈이 없으면 밥을 못 먹어서 힘들어요. 누가 나를 욕하고 괴롭히면 실질적으로 내가 마음이 아파요. 공허한데 공허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진실에 대한 사고
그래서 금강경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시죠, 집착 버려라 이렇게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집착. 버리고 살아라. 이거는 1단계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집착 버려라 하니까 불교는 집착 버리고 사는 종교야. 집착만 버리면 다 끝이야. 그래서 집착을 잘 버리는 사람이 최고. 그렇게 여기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 있잖아요.
회사에서 열심히 노력해서 증급하려고 하고 회사에 뭔가를 성취하려고 하고 자식을 열심히 학원도 보내가지고 좋은 대학 가게 보내게 하려고 하고 이런 노력, 그거 다 필요 없는 건가요? 쓸데없는 노력인가요?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공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다 의미 없는 짓을 너희들은 왜 하고 있니? 그거 다 집착하지 말고, 집착이야 너희들 바보야? 어리석은 중생이나 집착하는 거야. 그러면서 자기가 한량처럼 노는 것을 영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이죠.
그래서 금강연회에서 이렇게 말했죠. 양변에 치우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한마디예요. 음무소주, 이생기심 해라. 마음을 내지도 말라는 게 아니에요. 돈 벌어야지, 그 물질 내가 가져야지, 성공해야지. 이 마음을 가지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거예요. 마음을 내라의 방점이 찍혀있어요. 머물지 마라가 이걸 수식해 준단 말이에요.
머물지 않고, 즉 집착하지 않고 집착해서 반드시 돼야 되라는 집착 없이 마음을 내라는 거예요. 마음 내지 말란 말이 아니에요, 불교는 소유하겠다는 마음도 내지 마라. 그게 무소유다, 그게 아니란 말이에요. 소유 안 하고 어떻게 살 수 있으니까. 열심히 일해서 열심히 돈 벌고 열심히 자식 뒷바라지도 하고 남편 뒷바라지도 하고 할 수 있는 성취를 한단 말이에요.
집도 사고, 그 불교에서 다 하지 말라고 못하게 하지 않아요. 만약에 그게 진실이라면, 부자들은 절에 오기가 조금 찜찜할 거예요. 그리고 비싼 차를 끌고 집에 절에 오거나, 비싼 가방을 들고 절에 오기가 되게 찜찜할 거예요. 절에서는 무소유가 진실인데 나는 비싼 가방을 메고 다니는데 그거 얼마나 창피하겠어요? 절에 오기가, 저는 실질적인 나쁜 놈이니까, 집착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머문다는 바 없이 머무게 되면 머물러 있더라도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의 말들이 많아요. 소유하되 소유하는 바 없이 소유하게 되면 소유해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큰스님들이 때로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그냥 무소유로 살기도 하겠지만. 큰스님들 선 오르게 보면 정말 아주 단골로 나오는 얘기가, 뭐냐면 이 마음을 깨닫고 나면 소유와 무소유에도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하룻밤에 황금 만 량을 써도 내가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해요. 황금 만 량을 쓰더라도, 그게 쓰대 썬마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돈을, 전재산 예를 들어 한 천만 원이 있다. 이런 사람과 전재산 나는 100억이 있다. 하는 사람과 뭐가 다르겠어요? 100억 있는 사람도 어차피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잠자는 데는 한 평밖에 필요하지 않아요. 똑같이 인연에서는 똑같아요. 인연 따라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어가는 거예요. 본질에서 보면 다르지 않아요. 겉에서 모양에서 보면 다르죠. 모양, 상에서 보면 다르죠. 셰프가 매일 아침, 점심, 저녁 거창한 음식을 차려준다.
나는 그냥 내가 지은 농사 진을로, 내가 그냥 조촐하게 음식 해서 몇 끼 내가 먹는다. 겉모양만 보면, 전자가 훨씬 더 아름답고 거룩하고 뭔가 있어 보일 수 있지 않아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죠, 후자가 훨씬 아름다운 삶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겠죠. 자연 친화적인 삶이 아름다운 삶이고, 이렇게 사는 게 더 건강한 삶이고, 이렇게 사는 게 더 지혜로운 삶이다. 앞에 있는 사람은 환경 오염하는 거고 낭비하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도 있겠죠. 이처럼 주변 세상의 인연과 자기 마음이라는 인연에 따라서 끊임없이 삶이 그냥 흐를 뿐이에요.
그런데 나라는 개성이 있고, 나라는 성격이 있다. 그래서 이 착한 성격이 나야 돈 많은 게 나야라고 그렇게 자기라는 정체성을 나와 동일시하는 이유는 뭐냐면, 그게 내가 아니라 엄습이라는 건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세 번 하면 그다음을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 그렇게 될 확률이 높아요. 이게 업이 습관이 되어서 그래요. 비슷한 상황에서 욕하는 사람은 처음에 욕하기가 힘들지만, 두 번, 세 번, 네 번 하면 욕이 입에 붙게 돼요.
사기를 한 번, 두 번 치던 사람은 사기치기 쉬워지고요. 옛날 전쟁 때 보세요, 사람 처음 죽이기 어렵지. 한 번, 두 번 죽인 사람은 막 죽일 수도 있을 거 아니겠어요? 그 사람이 나쁜 놈이라서 사람 죽이는 게 아닐 수도 있어요. 전쟁 때 적군을 죽이면 영웅이 있는데요. 인연 따라 죽이는 걸 수도 있단 말이죠.
이럴 때면 그처럼 인연 따라 그러한 업의 습관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뿐이에요. 내가 전쟁에 나가서 사람을 많이 죽여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중에 뭔가 심리치료받고 전혀 이제부터 그러지 말아야겠다 참회하고 그리고 새롭게 살면 그 사람은 '저는 전의 사람과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업 보는 있으되, 작자는 없다'라고 했던 거죠. 업을 지으면 행위를 하면 행위에 따른 결과는 이어지는 데 있는데, 업을 짓는 자도 없고, 업을 받는 자도 없다.
업을 지을 때 그 자와 업을 받을 때 그 자가 정해진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요. 이 사람이 이어져서 받는다. 부천 옮겨가지 않아요. 나라는 정체성이 옮겨가지 않아요. 정체성이 없기 때문에 인연 따라왔다 갔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공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도, 공하지만 다시 공직, 공불리의 색인 줄 알아서 이 색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쓸 수 있는 거예요. 그걸 이제 유희산매라고 불러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고 사는 거예요.
열심히 돈 벌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자식 키우고, 열심히 무엇이든 마음 나는 것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머리 위주의 삶이 아니라, 머리 분별은 좀 쉬고, 뭐랄까, 가슴이 시키는 대로? 이것도 방편이지만, 조금 더 이게 머리는 분별에 가깝잖아요. 근데 가슴 뛰는 삶? 이런 것들은 좀 더 분별 이전에,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거, 나도 모르잖아요.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음악 전시회 가면, 미술 전시회 가면, 가슴이 뛰는 사람도 있고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랐지만, 나도 모르게 음악만 들으면 행복한 사람도 있고요.
알 수 없어요. 나도 알 수 없는데, 인연이 작동하는 거예요. 내가 작동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인연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 인연을 만나면 머리가 만들어낸 인연이 아니라, 머리가 쉰 채로 인연 따라 흘러가는 인연이 있잖아요.
이게 제가 방편으로 가슴을 표현했는데, 유의 조작해서 머리로 반드시 이렇게 해야 돼, 반드시 저렇게 해야 돼, 뭐 이렇게 안 하면 절대 안 돼 하고 집착해서 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일이, 혹은 자연스럽게 내가 그 일만 생각하면 가슴 뛰는 일 이런 게 있어요. 나를 행복하게 하는 어떤 일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 일들은 자연스럽게. 주어져요 억지스럽게 죽도록 해가지고 이만큼 얻어지는 게 아니라, 난 이만큼밖에 안 했는데 이만한 성취가 얻어질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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